Text - 초록치마(@_greenskirt)
- SKAM

- 2019년 1월 1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19년 1월 1일
Midnight Kiss
초록치마
짙게 어둠이 깔린 시간이었다. 길 건너편 아파트 어느 집에서는 아직도 파티가 한참인지, 왁자지껄 술에 취해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창문 너머 에반과 이삭의 침실까지 울려 퍼진다. 시끄러워…. 배고 있던 베개로 귀를 막아버리자 그나마 소음이 차단된다. 조금의 평안함을 되찾은 이삭은 습관처럼 팔을 뻗어 에반을 찾았다. 얌전히 품을 안아오는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의 살내음에서 평온을 찾는다. 마치 어릴 적 잠을 자지 못하고 칭얼거리는 이삭에게 엄마가 들려주던 자장가 같았다. 애정 섞인 멜로디가 귀를 적시듯 에반의 향이 코를 넘어 폐부 깊숙이 그의 애정을 전해준다. 이삭은 잠결에 살며시 미소지었다.
“Issy…. 잠이 안 와?”
졸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고막을 다정하게 울려왔다. 에반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겨온다. 곱슬거리는 뒷머리가 탱글거리며 얽혀오는 그림이 보지 않아도 모든 감각으로 느껴져 에반은 졸린 웃음을 지었다.
“Nei, Evy….”
대답과 함께 허리로 감겨오는 팔과 이젠 에반과 함께 눕는 것이 익숙하다 못해 지나치게 편해진 듯 골반 위로 길고 매끈한 다리가 척- 무게를 더했다. 귀여워. 내숭하나 없는 움직임에 에반은 그를 안은 두 팔에 힘을 가했다. 조금 갑갑해진 것인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이삭의 정수리에 입술을 쪽 맞춘다. 어느 겨울밤이었다.
어느 겨울밤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잠에 취한 이삭의 머릿속에선 그 어느 겨울의 어둑한 밤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오후 3시만 되어도 창밖이 어둑해지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숨을 내뱉으면 귀여운 구름이 입 밖으로 퐁퐁 쏟아져나오는 그런 평범한 겨울의 하루였다. 정신없이 울리는 알람을 끄기 위해 덜 깬 눈으로 침대 위를 더듬거려 손에 쥔 핸드폰에서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월 1일. 한 해의 첫 시작.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각자의 시간에 맞춰 앞으로의 365일의 행복과 평안을 기도하는 날짜. 또 어떤 이들은 친구들, 연인, 그리고 가족과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달력의 날짜가 바뀌는 순간을 초 단위로 카운트다운 하는 날. 그리고 지독히 멍청하게도 공부에 지쳐 반쯤 감긴 눈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져 버린 이삭이 놓쳐버린 한 해의 첫 1초. 2019년의 1월 1일이 벌써 10시간이나 지나버렸다.
“...Fy faen.”
그제야 지난 새벽 창밖 너머 울리던 소음이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소음이었는지, 왜 연구실 선배들이 그토록 빠른 퇴근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인지, 그리고 이삭의 공부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평소에는 문자도 조심스럽게 보내던 에반이 왜 어제따라 유난히 언제쯤 오냐는 독촉을 했던 것인지 이삭의 머릿속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퍼즐들이 저들끼리 꿈틀거리며 하나둘 사방의 짝을 찾아갔다.
“일어났어?”
한쪽 어깨에 이삭의 고개를 뉘어둔 채 잠에 빠져있던 에반이 부은 눈을 살며시 뜨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삭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겁이 났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초시계가 넘어가는 중요한 순간에 멍청하게 잠이나 쳐 자빠져 자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이삭은 팔등으로 두 눈을 가린다. 이대로 땅이 꺼져 시곗바늘을 돌릴 수 있는 세계로 나를 데려가 준다면 좋을 텐데.
1월 1일 자정은 연인에 대한 속설이 있는 날이었다. 이삭을 만나 처음으로 새해를 함께 보낸 순간부터 에반은 그 속설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새해맞이 파티를 하는 왁자지껄한 순간에도, 가족들과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에도 시침과 분침이 하나를 이루는 한 해의 마지막 밤이면 에반은 하고 있던 모든 것을 멈추고 이삭을 찾았다.
‘10! 9! 8! 7!’
초시계를 보며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 사이, 에반은 이삭의 두 볼을 부여잡고 그의 눈을 쳐다본다. 영문을 몰라 동그래진 두 눈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곤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3! 2! 1!’
‘Jeg elsker deg, Isak.’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이 일직선으로 만난 순간 에반은 부리처럼 귀엽게 빠져나온 이삭의 입술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목으로 감겨오는 이삭의 두 팔에 거리를 한 층 더 좁혀 온몸을 맞댄 채 둘은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 새해로 넘어가는 순간 입을 맞춘 연인은 그 해에도 어떤 시련 없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행복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는 믿음. 누가 어디서부터 퍼뜨렸는지는 몰라도, 철없는 커플들의 낭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삭과의 1분, 그 1분을 잇는 다른 1분이 로맨스로 가득 차길 바라는 철없는 남자 에반에겐 이삭과 보내는 새해의 첫 일초 속 달콤한 입맞춤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일 것이었다.
눈곱 달린 눈을 끔벅끔벅 거리며 겨우 상황 파악을 끝낸 이삭은 에반이 듣지 못할 작은 소리의 욕지거리와 함께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지난 밤 졸린 눈으로 벗어 던졌던 옷을 주워입고 밖을 향해 나선다. 혹시나 에반이 잠에서 깰까 무거운 문을 살살 닫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에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키스로 자정을 넘길 마음에 설레하며 자신을 기다렸을 에반이 두 눈에 생생히 그려져 이삭은 안개 섞인 새벽공기를 마신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지난밤을 로맨틱하게 보내지 못했으니, 당장 밖으로 나가 새해 선물이라도 안겨줄 작정이었다. 대체 무슨 정신인 거야.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뒤를 이었다.
에반과 함께 트론헤임으로 이사를 온 뒤,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치열한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싶어 코피가 뚝뚝 떨어질 때까지 공부를 해야 했고, 생활비에 보탬이라도 하고자 튜터링이라도 하는 날엔 해가 뜨기 전 도서관에 도착해 해가 지고 나서 집을 향했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적어지면서 이삭은 에반이 없이 해야 하는 것들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삭을 예뻐하던 교수 중 하나가 대뜸 그에게 연구실 보조 자리를 맡겨버린 것이다. 1학년 학부생으로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리였지만 심부름부터 간단하게 시작하면서 배우면 된다는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은 이삭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번 방학은 오슬로 못 갈 거 같은데?’
‘흠, 그래? 애들이 너 보고 싶어 하던데….’
아쉬운 마음에 말끝을 흐리던 에반이었지만 이삭이 꿈을 이뤄나가는 것에 뿌듯해하는 것은 자명했다. 이삭은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책 한 장, 한 글자라도 더 읽었으며 쉬는 날에도 연구실에 나가 선배들이 남겨놓은 자료들을 분석했다.
‘나도 그럼 집에서 공모전 준비나 하지, 뭐.’
혼자라도 오슬로에 가 친구, 가족을 만나고 오라는 제안도 만류하고 에반은 트론헤임에서 조용히 이삭과의 공간을 지키는 편을 선택했다. 연말이 다와갈수록 연구실 일정은 촉박해져서 갔고, 약속하지 않아도 불문율처럼 함께 하던 저녁 식사 역시 횟수가 줄었다. 에반은 단 한 번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시험공부 때문에 바쁘던 이삭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지쳐 들어온 그의 어깨를 매만져주고, 이삭이 들어올 시간에 맞춰 군침이 도는 음식으로 그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크리스마스 역시 이삭이 바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이삭은 에반과 함께 트론헤임의 친구들과 이브 파티를 즐기다 에반을 끌고 예산이 허락하는 한에서 가장 근사한 호텔에 가 분위기를 냈다. 하지만 이삭의 팔목에 둘의 이니셜이 새겨진 팔찌를 걸어준 에반의 선물에 비하면 자신이 준비한 것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고개를 숙였다. 새해에는 반드시 그를 감동하게 할 무언가를 준비할 것이라 다짐했다.
“요나스!”
“...Issy? 지금 몇신 줄은 알아?”
“너무 잘 알아서 문젠데, 너야말로 지금 몇신 줄은 알아? faen! 벌써 11시가 다 돼가는데 이제 일어난 거야?”
전화 넘어 잠긴 목소리로 혀를 차는 요나스에게 난데없이 화살을 돌린 이삭은 조급한 마음에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화를 내야 할 대상이 요나스가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보나 마나 뻔하지. 단둘이 연락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멀어지고 각자의 삶에 바빠지면서 이삭이 요나스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는 일은 점차 줄었고 그마저도 에반과 관련한 일들이 전부였다. 에반이 말이야, 에반이 좋아할까? 에반한테 물어볼게. 이삭과 연락이 닿을 때마다 쏟아지는 에반의 이름에 요나스는 그들의 사랑이 감탄스러우면서도 혀를 내찼다.
“자정을 놓쳤어.”
“뭐?”
“1월 1일 자정을 놓쳐버렸다고….”
허. 콧바람 가득한 헛웃음이 전화기로 쏟아졌다. 어이없다는 듯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입꼬리를 슬며시 올릴 얼굴이 생생해 이삭은 더 열이 뻗친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제 맘도 모르고 저를 한심하게 여기는 숨소리가 신경을 거스른다.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방법 좀 생각해줘.”
이삭이 막 커밍아웃을 하고 에반의 존재에 대해 입을 뗐을 때, 요나스는 막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친구가 기특했다. 언제나 까칠하고, 부모님과 누나 틈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친구가 제 감정을 진단하고, 타인에게 전할 수 있으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친구 된 보람을 느낄 때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에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올릴 때 그는 최선을 다해 이삭의 편을 들었다. 오해가 쌓여 에반이 단칼에 이삭과의 연락을 끊어버렸을 때 나름의 연애 조언을 해줬고, 이삭의 심술 맞은 성격이 싸움의 원인이 됐을 때도 무조건 이삭의 편을 들며 그의 화를 달래주었다.
“선물이라도 사줘야겠지?”
물론 이삭이 안정된 연애를 시작하고, 애인과 살림을 꾸려 오슬로를 떠날 때쯤이면 이 고민 해소통의 역할 역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조언을 해주든 결국 둘이 다시 붙어먹어 제 앞에서 서로를 물고 핥을 것이 뻔한 그림 위로 요나스는 붓을 들 의지를 상실한다.
“이삭. 오늘 1월 1일이야.”
나도 안다고! 요나스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오르다가도 이내 이성을 다잡은 이삭은 애꿎은 가로수에 발길질한다. 그리고나서도 화가 풀리지 않아 목 안쪽을 깊게 긁는 소리를 뱉어낸 이삭은 손가락으로 두 눈꺼풀을 꾹 누르며 화를 다스렸다. 화낼 때가 아니야. 방법을 생각해야 해. 요나스의 지적이 마냥 무의미하지 않았던 것은 정오가 다 돼가는 시간에도 어떤 상점이나 레스토랑 하나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Faen, 선물은 어디서 사지?”
“내 말이. 그냥 다시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해.”
“Nei!”
조명 하나 켜지지 않아 어둑한 어느 상점의 문턱에 걸터앉아 이삭은 마른세수를 했다. 울고 싶어졌다. 눈물이 코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꾹 참아본다. 다 큰 성인이 길거리에서 훌쩍거리는 게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것이다.
“이삭, 너 정말 진지하게 에반이 그런 거로 실망할 것 같은 거야?”
에반이 실망하는지의 문제가 아녔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줄곧 받기만 했다. 모든 로맨틱한 날의 주동자는 에반이었다. 로맨스라면 눈을 뒤집으며 거부반응을 보이던 이삭도 어느덧 에반이 자신에서 쏟아부어 대는 달콤함에 익숙해졌다. 이쯤 되면 자신도 그가 보여줬던 만큼 돌려주며 사랑을 확인시켜줄 시간이다. 그러나,
“끊어.”
“화났어?”
요나스 말이 맞았다. 에반이 이런 일로 실망할 일은 없다. 이삭과 또 한 번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지는 몰라도 이삭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이삭이 함께 보내는 자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삭에게 실망한 사람이 다름 아닌 스스로이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돌아가 봐야지.”
첫 이벤트는 둘이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였다. 친구들과 파티가 끝나고 피곤한 몸을 뉘려는 때 에반이 제 손을 이끌고 간 곳은 둘이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수영장이었다. 나체로 호텔을 뛰쳐나간 이후 한 번도 에반의 조증을 겪어보지 못했던 이삭은 혼란스러웠고, 에반은 그런 이삭을 물에 빠뜨린 후 다급하게 입을 맞췄다.
‘faen, Even!’
‘이번엔 누가 내려오는 일 없을 거야.’
‘어떻게 장담해?’
‘사랑하는 애인이랑 풀섹스하고 싶으니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지. 내가.’
터져 나오는 웃음과 목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둘은 결말이 뻔한 내기를 했다. 차가운 물 위를 부유하며 나누는 키스와 애무의 뜨거움에 이삭은 숨을 헐떡거렸다.
이삭의 생일엔 빨간 장미꽃잎이 잔뜩 흩뿌려진 흰 침대가 이삭을 맞이했다. 웃음을 참다못해 배가 아파질 때까지 웃어버린 이삭이 에반의 목에 매달려 짧은 키스를 쏟아부었다.
‘이게 로맨틱한 거야?’
‘그럼. 내가 오늘 여기 꽃잎 수 만큼 네 몸에 흔적을 남길 거거든.’
둘이 함께한 지 1년이 되던 날 에반은 긴장했는지 마른 입을 축여 가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아무 무늬도 새겨있지 않은 단순한 은반지와 가는 줄이 함께 들어있는 반지를 내보이며 에반은 이삭의 두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걸 끼운다고 나랑 결혼해야 한다거나, 평생 같이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래서 손에 끼고 싶지 않으면 목에 걸라고…. 그냥 나랑 떨어져 있어도 네가 내 존재를 느껴줬으면 좋겠어.’
상자를 받아든 이삭은 미소지으며 짓궂게 말했다.
‘그래서, 안 끼워줄 거야? 나 혼자 직접 끼우라고?’
반지를 집어 든 에반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삭이 내민 손을 잡았다.
‘어디다 끼워줘?’
긴장한 목소리에 맞춰 상쾌한 웃음과 함께 눈꼬리를 접던 이삭이 에반이 들고 있는 반지에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 끝을 맞췄다.
‘아직 청혼은 아니니까 왼손 주기는 아까워.’
하물며 이삭이 1월 1일의 첫 1초를 함께 하는 것은 에반이 준비해준 이벤트에 비할 바도 못 했다. 그냥 키스 1초 아니던가? 그조차도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린 이삭은 결국 밀려오는 수치심과 함께 발개진 얼굴로 얼마 멀리 가지 못한 발걸음을 돌렸다. 중요한 날을 챙기는 것은 단순한 의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밸런타인데이, 1주년 기념일, 서로의 생일, 크리스마스. 그날이 다가올 때면 기뻐할 상대의 얼굴을 상상하며 들떠 누구도 주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받지 못할 파트너로서의 애정을 쏟아붓는 시간이기에 기념일은 특별하다.
처음으로 새해를 함께 맞이한 날, 에반은 파티 속 카운트다운이 만드는 소음에 맞춰 이삭의 입술을 달콤하게 핥고선 그를 품에 안고 낮게 속삭였다. 올 한 해 동안 잘 부탁해, 이삭. 네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사랑할게. 어쩌면 그 사랑 고백 때문에 트론헤임으로 이사를 오고, 둘만의 집을 꾸리고, 각자의 삶을 갖춰가는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멍청한 속설 때문이 아니라, 달콤한 다짐 때문이었다. 서로의 믿음을 굳건히 만드는 다짐.
그런데 올해는, 나 때문에…!
“이삭?”
결국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털레털레 다시 돌아온 집 안은 따뜻한 온기와 향긋한 음식 냄새, 그리고 에반의 환한 미소가 가득 차 있다. 이삭은 억울함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 에반.”
계란을 휘젓던 스푼을 한 손에 들고 현관문 앞까지 쫓아 나온 에반은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품에 쏙 안겨 제 가슴 게를 천천히 적시는 이삭 덕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대체 자신이 잠들어 있을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가족에게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려온 걸까. 불안해진 에반은 이삭의 어깨를 잡아 살며시 밀어내며 그의 얼굴을 살피려고 했다. 그럴수록 더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품으로 깊게 파고드는 이삭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삭, 대체 무슨 일이야?”
“미안해….”
이삭의 등을 쓸어주던 에반의 움직임이 굳는다. 이삭은 작은 위로마저 없어진 것이 더 서러워 에반의 허리를 강하게 감싼다. 조심히 고개를 올려 이마를 대고 있던 가슴팍에 턱을 대며 눈을 맞추자 에반이 평소보단 조금 크기를 키운 두 눈으로 이삭을 오롯이 내려다본다.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에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이삭은 알 수 없었다. 이삭이 에반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와 죄책감에 사과하는 거라는 망상-에반의 머릿속에 이삭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이 유일한 죄일 것이다.- 때문에 표정이 굳어가는 건지,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이삭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만회하지 못할 실수에 대한 절망이 가득했다.
“..흑, 어젯밤에.”
“밤?”
밤이라는 단어에 에반의 미간이 좁아진다.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는 이삭을 품에서 떼어내고 조금 단호하게 그를 내려다본다. 밤. 그래, 지난밤에 나 없이 무슨 일이 있던 건데?
“응…. 자정에 말이야..”
“자정?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잠들었잖아.”
“그러니까...! 미안해, 흐윽….”
분명히 이삭은 지난 밤늦게 들어와 피곤함에 지쳐 차마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고, 새벽에 소음이 거슬리는지 칭얼거리길래 에반이 폭 안아주기까지 했다. 뭐가 미안한지 얼굴을 전부 적시며 눈물을 쏟아내는 이삭이 이해할 수 없어 에반은 촉촉하게 젖은 볼을 쓸어올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진정해, 이삭. 무슨 일이야? 천천히 말 해봐.”
“키스, 흡. 못했잖아….”
키스? 에반의 눈썹이 의문으로 꿈틀거렸다.
“어젯밤에… 우리 자정 같이 보냈어야 했는데.”
이삭이 미안한 것은 놓쳐버린 한 번의 키스 때문이 아니었다. 에반을 사랑하는 마음, 그를 행복하게 해줄 생각으로 기대감에 부풀었던 시간, 또 다른 일 년을 너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의지. 그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한 자신이 미웠고 억울해서였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쁘게 돌아가는 에반의 회로는 이삭의 대답 속에서 그가 울고 있는 이유의 정답을 찾아낸 뒤 그 어떤 별빛보다 은은하게 빛나는 미소를 자아낸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우는 거야?”
이벤트라면 소름이 돋는다며 눈을 굴리던 연애 초반의 이삭이 생각난다. 로맨틱한 온갖 것들이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면 에반은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들린 꽃집에서 사 온 꽃다발이나, 아무도 둘을 발견하지 못할 숲속에서의 피크닉 같은 것들. 그러나 싫은 티를 내며 눈을 굴리다가도 에반이 한눈을 판 틈에 살며시 볼을 붉히며 미소짓는 이삭을 위해선 포기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고, 그의 행복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새해의 로맨틱한 순간을 보내지 못해 눈물짓는 이삭은 뜻밖의 기쁨으로 다가온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기대와 확신.
에반은 이삭을 제 품에서 떨어뜨리고 부엌으로 가 천장 구석에 지난 크리스마스 때 쓰고 남은 양초들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리고 불을 켰다. 이삭이 그의 뒤 꽁무니를 쫓아 쭐레쭐레 따라왔다. 촛불을 켜자 부엌은 노란 불빛과 에반이 준비하던 음식 내음으로 가득 찼다. 에반은 이삭의 청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끈다.
“뭐 하는 거야?”
“놓쳤으면 다시 하면 되지.”
거실의 커튼까지 닫아버리고 나자 집 안은 오로지 몇 개의 촛불에 의지해 빛을 만들어냈다. 놓쳐버린 자정처럼 어둡진 않았지만 그들의 로맨스에는 한층 더 가까웠다.
“이게 뭐야.”
투덜거리는 이삭의 소리를 뒤로하고 에반은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빼 든다. 도로록-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시침과 분침이 뒤로 향한다. 핸드폰도 끄고, 부엌 안으로 들어오는 빛도 차단해버린 시각 11시 59분. 둘의 시간이 다시 설정된다.
“같이 자정을 못 보내서 너어무 아쉽잖아.”
“치….”
에반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삭 앞에 한 걸음 다가갔다. 귓가에는 초침이 혼자 정신없이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만 울려왔다. 눈물이 말라 이삭의 속눈썹이 덩어리로 얽혔다. 뾰로통한 입술이 미소를 주체하지 못했다. 부끄러운지 에반을 올 곳 바라보지 못하면서도 눈을 마주칠 때마다 촛불이 비춰 따듯하게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에반에게 사랑을 전한다. 에반은 이삭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자연스럽게 이삭의 두 팔이 허리를 감는다. 서로 닿은 살결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가 촛불이 데워놓은 공기보다 따뜻하다. 에반은 가까워진 두 얼굴 사이의 거리에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한다.
10, 9, 8, 7….
둘만의 새해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godt nytt år og elsker deg.”
“elsker deg, Even.”
3,2,1.
초침과 분침, 시침이 하나가 된 순간, 입술과 입술이 드디어 제 자리를 찾은 듯 서로의 위에 안착한다. 살며시 벌어진 틈새로 파고드는 말캉한 혀가 침샘을 자극한다. 끝이 올라간 입꼬리와 감은 눈 사이로 느껴지는 서로의 미소가 사랑스러워서 더 깊게 서로를 찾는다. 움직임이 멈추고 입술을 맞댄 채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촛불이 일렁이는 파란 눈과 초록 눈이 아름다웠다. 한 차례 감상을 마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시야는 어두웠지만, 마음은 어느 때 보다 밝았다.
차단된 시간과 공간, 사랑하는 이와의 입맞춤, 또 다른 영원의 약속,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확인하는 또 다른 순간. 1월 1일의 또 다른 자정이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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