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 낭만(@feat_roman)
- SKAM

- 2019년 1월 1일
- 7분 분량
Crazy Fucking Lucky New Year
낭만
“크리스마스엔 뭐하셨어요?”
이제 막 그날이 지난 참이니 뻔한 질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삭은 그 ‘뻔한’ 질문에 태연할 수 없었다. 고장 난 로봇처럼 멈칫하고 삐그덕댔던 몸이 다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데 몇 시간은 걸린 기분이었다.
“…그냥, 집에 있었어요.”
“아깝네요.”
“뭐가요?”
“작가님 얼굴이요.”
그리고 그거, 거짓말. 혀를 베에 내민 에반이 몸을 일으키고 그다지 높지 않은 선반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래, 저 다리가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겠지만. 브라운관보단 스크린에서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얼굴의 배우치곤 슬림한 몸매가 의외였지만, 아이돌 출신이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요즘엔 모델 출신 배우들도 많아 슬림한 몸매의 배우들도 많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취향이었다. 얄쌍하니 근육이 촘촘하게 박힌 에반의 몸이.
아무튼 이삭은 그날 집에 있었던 건 맞았으니 했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냥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후…. 습관처럼 한숨을 내쉰 이삭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고 탁자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눈을 감으니 그나마 나았다. 시야에서 그 기다란 몸이 사라지니 띵하게 울리던 한쪽 머리가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날은 말하자면 실수였다. 간만에 들이부은 술에 텐션이 머리끝까지 올라있었고, 그래서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의 취향 범벅인 남자가 몇 시간 전 어시스턴트에게 건네받았던 프로필 속 남자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이것저것 물불 안 가리고 남자를 만나고 다니긴 했지만, 이삭에게도 나름의 규칙이라는 게 있었다. 이를테면 같이 일하는 사람과는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거나 하는.
하지만 그땐 만취 상태였으니 그냥 마음에 들어서 눈에 익은 정도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혀가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하고 기분이 좋았다. 키스도 잘했고, 그것도 잘했다. 그러니까… 섹스. 에반은 ‘스’로 끝나는 것에서 뭐든 월등했다. 이건 이삭이 에반에게 침대 위에서 해준 말이었다. 물론 취해서. 술이든 분위기든.
‘스요?’
‘키스, 페니스, 섹스.’
‘그런 말 용케 잘하네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삭은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생각이 뻗는 거야. 미간을 좁힌 채 감았던 눈을 뜨다가 이삭은 그대로 심장이 멎을 뻔해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악!”
“작가님, 미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미간 좁히는 거, 침대 위에서만 그러는 거 아니구나? 섹시해서 좋긴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해서요. 기다란 손가락이 미간을 문지르다 사라졌다. 또다,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훌쩍 사라져버리는 건 특기인 것 같았다. 그날도 그랬다. 눈을 뜨니 전날 밤 일은 꿈이었다는 듯 집 안에 다른 사람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깔끔해서 좋네. 뻐근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렴 다 좋았다. 그날 그 남자가 에반만 아니었으면.
손이 닿았던 미간에 뜨끈뜨끈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아서 이삭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꾸욱 눌렀다. 컨셉이긴 했지만 쉬는 시간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에반은 상의를 탈의한 채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손에는 간식용으로 사둔 피자. 물론 스텝용. 모델들은 촬영 도중 잘 먹질 않았기 때문에 메뉴는 늘 스텝을 생각해서 골랐다. 노출이 있는 촬영에도 저렇게 고지방 고탄수화물의 피자를 잘 먹을 줄 알았으면 조금 더 푸른색의 간식을 주문했을 거다.
“에반 씨, 아직 촬영 안 끝났으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말아요.”
“옛썰!”
장난스럽게 거수경례까지 하고선 또 크게 피자를 한 입 베어 문다. 애초에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지, 저거. 에효….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이삭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찌 됐든 이삭은 적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에반과 함께 작업을 해야 했다. 원래 이삭의 성격이라면 A컷까지는 모델과 함께 고른 뒤 정리를 하겠지만 오늘은 그마저 어시스턴트한테 넘기고 먼저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10분 뒤에 다시 촬영 들어갈게요~”
큰소리로 외친 이삭의 시야에 다시 에반이 들어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게 어지럽게 꾸며놓은 스튜디오에 에반이 제집마냥 돌아다녔다. 지금 그 어떤 모델을 데려다 세워놔도 에반만큼 어울리진 않겠네. 골반에 반쯤 걸친 트레이닝복에 부스스한 머리.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화보 촬영이겠지만, 어쩐지 취향을 당한 쪽은 이쪽인 것 같아 이삭은 괜히 헛기침을 큼큼했다.
“취향 어디 안 간다니까….”
들뜬 분위기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날에도, 취향만큼은 실수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이삭이었다.
*
“어디 가요?”
“왜 벌써 나와요?”
“A컷은 돈 내는 사람들이 알아서 고를 거예요.”
“아니 그래도,”
“작가님도 같은 생각으로 나온 거 아니에요?”
이삭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반박을 하게 되면 에반을 피했다고 고백하는 꼴이니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둘둘 감은 목도리에 코까지 파묻었다. 너랑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도 에반은 강아지마냥 졸졸졸 이삭의 뒤를 따라왔다.
해가 졌다고 해도 번화가였다. 그 흔한 마스크도 하지 않은 에반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대는 게 이삭한테까지 느껴지는데도 에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저게 바로 셀럽의 삶인가. 그러고 보니 그날에도 에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술집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게이’바에서.
원래 주변을 의식 안 하는 편인가, 아님 내가 커밍아웃한 배우를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있는 건가. 쌀쌀한 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목적지 없이 걷던 이삭이 길 한복판에 우뚝 섰다.
“혹시 커밍아웃했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겠죠?”
“아, 충분히 미쳐 보여서.”
“당연하죠.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날 촬영을 잡겠어요?”
그제야 날을 곱씹어보니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쩐지 거리에 사람이 많더라. 날도 더 추운 것 같고. 이 도시의 크리스마스는 새해까지 계속됐다. 크리스마스 주의 vacation을 제외하면 거리엔 늘 사람이 복작였고, 들뜬 분위기가 괜히 사람을 설레게 했다. 날씨도 그랬다. 별로 춥지도 않은데 괜히 더 추운 것 같았다.
“어디까지 따라올건데요?”
“작가님 집까지 따라갈건데요?”
“왜요?”
“거기 뭘 좀 두고 와서요.”
“오늘 집 안 들어가요.”
“뭐 두고 갔냐고 왜 안 물어봐요?”
“누구 좋으라고 물어봐요?”
“작가님.”
에반의 잘 뻗은 검지 손가락이 에반을 향했다. 동시에 이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울함을 표출했다.
“나요? 나 좋으라고?”
“아니, 작가님 두고 왔다구요.”
“저기요, 에반 씨.”
“네, 이삭 작가님.”
한 마디도 안 졌다. 에반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자료조사─라고 하고 사심 채우기라고 읽는다─를 하느라 찾아본 영상 속에서 에반은 이런 깐돌이과(科)는 아니었다. 여심을 움직이는 멍뭉이과(科)랄까. 여심 말고 이삭의 가랑이 사이의 다른 것도 움직인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어찌 됐든 이렇게 계속 입씨름을 해봤자 손해 보는 건 이삭이었다. 이삭은 다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앞만 보고 걸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하면 알아서 집에 가겠지. 하고 생각했던 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에반은 생각보다 끈질겼고, 갈 곳을 정해두지 않아 같은 곳만 맴도는 이삭의 발걸음을 계속해서 쫓아왔다. 이삭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민을 하거나 깊은 생각을 할 때 나오는 이삭의 습관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반은 이렇게 보내기엔 아까운 건 맞았다. 외모도 취향이었지만 이런 저런 걸 다 따져봤을 때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기보단 오히려 좋았다. 최근 만났던 어떤 남자들보다 더. 그렇다고 계속 만나기엔…? 에반과는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였고, 우선 무엇보다 에반은 연예인이었다. 얽혀서 좋을 게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No. 근데 지금 얘가 나 좋다고 따라오는 건… 음… 음…. 어차피 이번 촬영만 끝나면 안 볼 사이긴 한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그래요, 에반 씨.”
“생각 다 하셨어요?”
그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사람들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길 한복판에서 우뚝 서 있는 건 확실히 민폐긴 했다. 게다가 에반과 함께라면 더욱.
우선 이삭은 에반의 팔꿈치쯤을 잡아 이끌었다. 어디든 조금은 조용하고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갈 참이었다. 하지만 연말의 번화가는 이삭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카페를 세 군데쯤 돌아다닌 이삭이 결국 찾은 곳은 으슥한 골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여기로 데리고 왔을 텐데. 이곳저곳 다니느라 다리가 아플 만도 한데 에반은 여즉 싱글벙글이었다.
“여기면 괜찮아요, 작가님?”
에반의 말에 눈을 꾹 감았다 뜬 이삭이 말을 이었다.
“에반 씨, 그날은 실수였어요. 내가 너무 취했고, 그래서 에반 씨를 못 알아봤어요. 알아봤으면,”
“알아봤어도 내가 마음에 들었을걸요?”
빠득. 이삭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애써 미소짓고 있었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왕 마음먹은 거 좋게좋게. 마음속으로 다시 주문을 되뇌었다.
“어쨌든 실수였어요.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아, 작가님 또 미간.”
미간 사이로 또 단단한 손끝이 꾸욱 닿았다 떨어졌다. 아니 그러니까 침대 위에서만 미간을 좁히는 사람이 어딨냐고!! 이삭이 다시 한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순간 입술에 말캉한 게 닿았다. 범인은 당연히 에반. 당황해서 에반을 밀쳐낼 틈도 없이 뒷머리가 잡혔고 입안으로 뜨거운 혀가 침범했다. 이건 이미 알고 있는 자극이었다. 그래서 속수무책. 아까도 말했지만 에반은 ‘스’로 끝나는 것엔 월등했다. 그날도 그랬다. 에반의 키스 한 번에 녹았다. 지금도 그랬다. 에반을 향해 단단하게 세웠던 벽이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졌다.
키스, 한 번이었다.
*
그 뒤론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눈을 뜨면 앞에 에반의 얼굴이 보였고, 다시 눈을 뜨면 현관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눈을 뜨면 천장이 보였고 다시 에반의 얼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렸을 때 뭣 모르고 손댔던 마리화나를 한 것처럼 기분이 붕 뜨고 온몸이 뜨거웠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같은 상태인 에반과.
“작가님, 아직도 실수 같아요?”
“…….”
에반은 이삭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촬영 중간 쉬는 시간에 가운도 안 걸치고 스튜디오를 돌아다닌 게 그랬고, 아까 같은 상황에서 입술을 부딪쳐 온 것도 그랬다. 도톰한 입술, 늘씬한 몸매. 이삭이 그걸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았고, 그걸 잘 활용했다. 영악하고 또 영악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 위로 에반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두드리듯 움직였다. 약한 자극에도 몸이 움찔거릴 만큼 예민했지만 이젠 응해줄 힘도, 반항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몸이 힘든 만큼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빨랐다. 그래, 어차피 오늘 같이 일하면 다신 일 안 할 거였는데.
“인정해요. 당신을 택한 건 실수 아니었어요.”
“으흠?”
“근데 어쨌든 그날은 실수가 맞아.”
“이제야 작가님 같네.”
에반은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분명 바에서 만났으면 이름을 불렀을 것 같은… 어? 이삭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번엔 눈을 감는 것 대신에 눈동자를 마구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날, 에반이 나를 뭐라고 불렀더라? 그리고 나는?
‘작가님 내가 마음에 들어요?’
‘우리 나갈래요, 작가님?’
단번에 미간이 좁혀졌다. 또, 또 미간. 옆에서 에반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잠깐 가만히 좀 있어 봐. 그러니까 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접근했다는 거잖아? 이거 순 사기꾼 아냐? 라고 생각하는 순간 떠오르는 자신의 목소리들.
‘에반이죠? 에반. 내가 당신 마음에 들어서 이것저것 찾아봤단 말야.’
‘당신 보통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고, 내가.’
미친 게 분명했다. 그날은 취한 게 아니라 미친 거였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군데군데 끊겨있던 필름이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배우니까 다른 데 가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한 것도, 관계가 끝나고 눈을 뜨자마자 옷을 입혀 집에서 내보낸 것도, 기억 못 하면 짓궂게 굴 거라는 에반의 말도, 기억할 거라고 장담하던 본인의 말도.
“…….”
“다 기억났구나?”
이삭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익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니까 정말 에반의 말대로 실수가 아니었다. 시작은 누가 됐든, 서로를 아는 상태에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니 진짜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쳤다, 미쳤어 진짜.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실수 아니라니까.”
“…….”
“어때요, 나?”
이불 밖에서 말하는 에반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불속에서 귀를 막고 있는데도 선명하게 들리는 말소리에 이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 어떻긴 어때. 그걸 말해 뭐해, 진짜. 입만 아프지. 문제는 이삭이었다. 한참을 이불 속에서 끙끙거리던 이삭이 꾸물꾸물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더워서 못 있겠다.”
“담배?”
“응.”
에반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이삭에게 건넸다. 이것도 데자뷰.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날이 떠올랐다. 눅눅해진 필터에 혀를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고, 좋고, 또 좋은 기억이긴 한데 떠올릴수록 부끄러운 일만 가득해서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털었다.
이삭은 생각보다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더 생각하면 머리만 아파질 게 뻔했다. 아까야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생각해서 필사적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고, 뒷걸음질 치다 에반을 잡았다. 됐네, 뭐.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릎을 모으고 베개를 그 위에 올려 얼굴을 기대고 에반을 쳐다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게 좋아서 그대로 들고 있던 담배를 건네면 입술로 받았다.
야해, 정말.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뭐가요?”
“우리 둘이요.”
“작가님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내가 먼저 물었는데. 반칙이다 반칙.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에반이 이삭의 뺨에 키스했다. 이건 대답한 거나 다름없지 않나. 담배를 피우고 키스를 받으니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것도 같았다.
“근데 나를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그 촬영이 그냥 잡힌 줄 알았어요?”
“아….”
어쩐지. 이상하다 싶긴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거액을 준다니 덥석 문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갑자기 바뀐 촬영 날짜가 제일 의심스러웠고, 그다음에야 에반의 회사에서 직접 연락 와서 의뢰를 한 게 그랬다. 무슨 화보인지도 몰랐다. 그냥 컨셉을 조율하고 촬영을 잡았다. 요즘 정말 아 무생각 없이 살았네.
옆에 몸을 뉘인 에반을 힐끗 쳐다보다가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렴 어때. 지금도 아무 생각 없이 취향인 남자 품에 안겨있고만 싶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머리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거부할 생각도 없이 고개를 들자 입술이 딱 들어맞았다. 쫍, 쫍. 조금은 진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올 한 해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연하의, 잘 빠진, 돈 많은, 내 취향의 남자 품에서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건.
“에반, 지금 몇 시?”
“아마도 해피 뉴 이어.”
행운 같은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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