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 유하(@uha3695)
- SKAM

- 2019년 1월 1일
- 18분 분량
D-Day
유하
Prolog. D-21
원래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었느냐 묻는다면 글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짐작이 틀렸다 하더라도 아무렴 어떨까.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귀신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 집에 갇히게 된 건지. 온갖 궁금증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것 하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은 이 곳에서 눈을 뜨는 동시에 어딘가로 달아나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이삭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이삭은 이미 죽어 있었지만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삭은 ‘정말로’ 죽음에 들고 싶었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지고 싶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삭이 바라는 대로 귀신에게도 죽음의 기회는 존재했다. 죽은 날로부터 꼬박 1년이라는 시간을 채울 시, 비로소 진정한 영면에 든다. 누가 이런 법안을 만들었는진 모르겠으나 그것이 이쪽 귀신 세계의 룰이었다. 더 빠른 지름길도, 돌아가는 길도 없이 무조건 1년 365일을 엄수할 것. 게다가 귀신의 몸에는 지울 수 없는 숫자가 새겨져 있어 디데이까지의 카운트다운이 자동으로 매겨졌으니 한마디로 반칙은 금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이삭의 손목에 새겨진 숫자는 21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귀신으로서의 삶은 보통의 지긋지긋함과 보통의 무료함을 넘어 말 그대로 최악에 가까웠다. 솔직히 영문도 모른 채 침대에서 눈을 뜬 첫날하고도 이틀 정도는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 급급해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알아나가야 하는 것투성이라 조금은 즐거워했을 지도 모른다. 잠에 들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잠이 오지 않는다는 점. 그 무엇도 일절 먹을 수 없다는 점. 대부분의 물건은 만질 수 있지만 옮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잔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점. 그래, 사실 감탄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넷째 날에 접어든 다음날, 무언가를 찾으러 온 한 쌍의 남녀가 이 곳에 발을 디딘 그 때. 이삭은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사람은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지쳐버리기도 하지만 결국 그 감정들을 치유해주는 것 역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의 고립된 섬과 같이 홀로 살아나갈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죽은 이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이다. 이삭은 그 날 그저 간만에 본 사람들에게 반가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손을 뻗었고, 그리고 정말 당연하게도 뻗었던 자신의 손이 남자의 팔에 닿지 못한 채 통과되었을 뿐인데 안타깝게도 문제는 이삭이 그제서야 뒤늦게 현실을 직시했다는 것이었다.
‘저기, 내 말 안 들려요?’
제가 진짜 안 보여요? 바로 앞에서 손을 크게 흔들어 보여도 둘의 묵묵부답은 매한가지였다. 이삭이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도, 얼굴을 맞댈 수도, 손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남녀는 서로 띄엄띄엄 말을 주고받다 물건을 찾았는지 박스를 가지고 집을 빠져나갔고 집 안엔 다시 적막함이 찾아왔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귀신이 된 셈이었다. 또한 이는 슬프게도 외톨이가 되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삭은 늘 혼자였고 외로웠다.
“혹시 누구 있나요?”
그러니까 제발 죽고 싶다고 소원을 비는 이삭에게 오늘, 누군가가 방문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1. D-19
“할 일이 그렇게 없어?”
“아닌데요?”
에반. 녀석의 이름은 에반이라 했다. 나이는 스물둘. 근처 카페에서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다 돌연 몇 개월간 트롬쇠로 여행을 갔었고, 되돌아와 일한 지는 두 달 되었으며 취미로는 사진을 찍는데 그 일에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이 곳에 찾아온 것도 사진 촬영을 위해서였단다.
“사진도 찍게 해줬는데 왜 계속 찾아오는 거야?”
“음, 심심해서요?”
제가 워낙 낯을 가려서 친구가 없거든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에반에 이삭은 절로 어이가 없었다. 낯가리는 것 치고 생판 처음인 저와 3일 내내 잘만 대화하고 있지 않냐며 이상하다고 투덜거리자 녀석은 호탕하게 웃어댔다. 저 망할 웃음소리가 좋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끌어냈을 텐데. 애꿎은 침대자락이 이삭의 손끝에서 구겨진다.
“아르바이트도 한다며.”
“오늘은 7시부터 하는 날이라 카페 가기 전에 잠깐 들렸죠. 이삭은 오늘 뭐 따로 하는 일 없어요?”
평소 이삭의 일과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단조로움의 연속이었다. 해가 뜨면 책장에 남아있는 책들을 읽기 위해 애를 쓰다, 해가 떨어지면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간혹 운이 좋은 날에나 귀신의 집이라느니 빈 집임에도 잠겨있지 않다느니 잡다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동네 꼬맹이에게 겁을 줘 달아나게 만드는 놀이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마저도 실은 스위치를 딸깍거리거나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행동에 불과했지만.
“나야 뭐, 근데 왜 계속 말을 높여서 해? 네가 나보다 더 나이 많다니까.”
“처음부터 말을 놓으면 예의 없어 보이잖아요. 관심 있는 사람한텐 그렇게 보이기 싫더라고요. 센스 있죠.”
“아니, 바보 같아.”
에반은 안 믿는다는 듯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어쩜 저렇게 웃을 일이 많은 걸까. 이삭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보나마나 아무렇지 않게 이삭이 좋아 웃는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답을 내놓으리라.
2. D-18
“혹시 누구 있나요?”
그것이 에반이 이 곳에 처음 온 날 내뱉은 첫마디였다. 푸른 눈을 반짝이는 녀석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기에 동네 꼬맹이들처럼 소문을 주워듣고 온 실없는 사람이겠거니와 지레 짐작하기 딱 좋았다.
“있으면 뭐 어쩔 건데?”
고함을 지르며 방문을 쾅 닫아버린 것까지도 이전에 해왔던 행동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죄송해요. 방에 계신 건가요?”
잇달아 그다지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녀석이 노크를 해오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
“이삭, 궁금한 게 있는데.”
“안 가르쳐 줘.”
“우리 너무 떨어져있지 않아요?”
“이게?”
에반과 이삭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애초에 만나게 된 12월 11일. 쾅 닫힌 문을 열어도 되냐는 에반에게 안 된다고 손사래 친 그 날부터 그랬다.
“서로 얼굴도 못 보고 대화하는 거잖아요.”
“이대로도 괜찮은데.”
“섭섭하네. 저 오늘 카페에서 샌드위치도 가지고 왔단 말이에요.”
“안 먹어.”
“먹을 거로도 안 넘어와요? 그럼 또 뭐가 있지. 아, 나 잘생겼는데.”
풉. 회유책이랍시고 진지하게 본인의 외모를 치켜세우는 에반 덕에 이삭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문 뒤에서 에반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는지 무어라 무어라 웅얼거려댔다. 대충 거짓말 아니고 진짜 잘생겼는데 믿지를 못하네, 그런 말인 듯 했다.
“이렇게 앉아 있어도 상관없긴 한데 왜 매일 방에만 갇혀있나, 숨어 있는 건가 궁금해서요.”
이삭의 웃음소리가 잠잠해지자 에반은 마저 물어왔다. 굳이 대답을 바라며 물어온 어투는 아니었다. 에반은 이내 노래를 흥얼거려왔고 이삭은 말없이 문에 몸을 기댄 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저의 목소리를 들은 게 맞나 싶어 가까이 가 얼굴을 살폈을 때에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란 게 보이지 않았고 특히 깊은 눈매가 그러했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문제였다.
이삭은 몸을 문으로 기울여보았다. 순식간에 통과된 문 앞에는 부스럭거리는 에반의 모습이 드러난다. 다 먹은 샌드위치를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이삭은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삭의 눈에는 에반이 가득 담기지만 에반의 눈에는 이삭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에반은 이삭을 바라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힘을 들이지 않으면 어떠한 물체든 통과할 수 있는 귀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아마 에반의 물음에 이삭이 답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이 물음에도 대답은 없을 것이다. 이삭은 도로 문을 통과해 제 방에 들어갔다.
“내 얼굴은 앞으로도 절대 안 보여줄 거야.”
“네? 왜요?”
“내가 좀 못 생겼거든.”
“못 생겨도 괜찮은데?”
“심각한 병도 걸렸어.”
“나도 심각한 병 하나 앓고 있는데. 통했네요.”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실랑이가 오갔지만 결국 둘 중에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이는 에반이 될 터였다.
3. D-17
에반의 발소리는 다른 이들과 많이 달랐다. 가벼우면서도 경쾌한 게 꼭 어딘가로 소풍을 가는 발걸음을 하고 있어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녀석이구나,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 뿐인가. 또 놀러 왔어요, 이삭. 부드러운 말투로 현관문을 두 번 두드린 다음 신발을 벗고 들어와 방문에 또 노크 두 번. 그것도 에반의 사소한 버릇이었다.
“에반, 멀었어?”
“100초만 더 세고 있어요.”
“또?”
“이삭이 너무 빨리 세는 거예요. 5분밖에 안 지났다니까요.”
“장난해?”
에반은 작게 웃어 보이다 달그락 소음을 만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것도 업보라면 업보라 쳐야지. 이삭은 성을 내면서도 얌전히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매트리스에 풀썩 도로 몸을 가누었다. 1,2,3....... 착실히 숫자까지 세주는 건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라고 하자.
에반의 버릇으로는 또한 질리지도 않는지 항상 손에 작은 물건을 들고 온다는 것을 들 수 있었다. 녀석의 목적은 단순했다. 짜잔. 요상한 감탄사와 함께 이삭에게 저가 무엇을 가져온 지 볼 수 없어 아쉽겠다며 문을 열어달라 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카메라. 그 다음엔 커피. 다시 카페라. 그 다음엔 샌드위치. 이삭이 매번 문을 통과해 몰래 지켜보고 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에반이 알았더라면 비탄에 빠질 정도의 정성이었다. 오늘도 눈을 감기 전, 이삭이 슬쩍 보아하니 들고 온 물건의 정체는 문의 크기를 재느라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게 딱 줄자였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지루해하며 에반의 곁에 서서 다 본 주제에 이삭이 늦게나마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오늘따라 에반이 간곡하게 청해서였다. 부탁한다고 해서 들어줄 필요야 없었지만 그간 아무것도 안 보인다며 시치미 뗀 게 양심에 걸리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다른 때 같으면 회유를 하다 제 풀에 지쳐 이삭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술술 불어댈 타이밍인데 에반이 질문은커녕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줄자를 이리저리 가져다 대느라 바쁜 게 신기하여 한 번쯤 속아주는 척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들어준 것이었다.
“눈 감고 있는 거 맞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줄자로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러는 건지. 그 질문만 3번째였다.
“얼른 하기나 해. 눈은 왜 감으라는 거야? 어차피 문 때문에 하나도 안 보이는데.”
“잔꾀 부려서 몰래 볼까봐 그러죠.”
“내가 투시 능력이라도 있을 거 같아?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이삭은 손을 내려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은 굳건히 흰색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봐봐. 역시 투시는 안 된다니까.
“다 됐어요.”
똑똑. 때마침 에반은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막 100을 셌을 때였다.
“이삭. 문 열어봐요”
“그 말 왜 안 말하나 했다.”
에반에게 도돌이표가 있다면 그 기호는 저 말을 감싸고 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 얼굴은 절대 안 보여준다니까 그러네. 이삭은 핀잔을 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진짜 안 열면 후회할 걸요? 에반은 짧은 시간 동안 뭘 꾸미긴 했는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전 착하니까 힌트도 줄게요.”
약을 올릴까 하던 이삭은 못된 생각을 접어버리고는 에반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말해봐.”
“방문 위에 커튼 봉 달려있는 거 알았어요?”
“그럼. 내 집인 걸.”
방문 위에 있는 이상한 커튼 봉의 위치는 이삭이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삭은 300여 날들 중에서도 해가 너무도 긴 날에는 무료함을 달래고자 왜 방문 위에 저게 위치한 걸까 추리하곤 했다. 상상력이 부족해 바로 질려버리긴 했지만.
“그게 힌트야?”
“그럼 노란색 좋아해요?”
“좋아할 걸?”
“다행이다.”
힌트를 준다더니 죄다 질문이야. 이삭은 볼멘소리를 하려다 멈칫했다. 커튼 봉에 좋아하는 색깔을 물어오는 건. 어쩌면 그 말들은 질문이면서 힌트일는지도 몰랐다. 설마. 이삭은 딱 한 가지 떠오르는 바가 있었지만 고개를 저어댔다. 그런다고 제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랬을 리가.
“암막 커튼. 비싸던데요?”
하하. 마지막 힌트예요. 에반은 이삭이 짐짓 부정하고 있던 예상이 맞음을 못박아왔다.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문 열어봐요. 한 번 더 권하는 에반에 이삭은 못이기는 척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방문을 열자 온통 샛노란 빛깔이 이삭을 반겼다. 천 따위를 펼치는 소리가 들리더라니. 이삭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짙은 노란색 커튼이었다.
“진심이야? 얼굴도 못 보는데 고작 방문 하나 열겠다고 커튼을 사왔어?”
감동이긴 했지만. 이삭은 솔직하게 떠오르는 인상을 삼키며 커튼에 한 발짝 더 바짝 다가갔다. 문과 달리 커튼은 얇디얇기만 하여 잘못하면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얼굴은 직접 못 보더라도 문이랑 천이랑은 천지차이잖아요.”
이삭이 나무라봤자 에반은 저의 소원대로 방문이 열림에 마냥 좋은지 웃음을 흘리며 커튼을 톡톡 쳐왔다. 그리고 이런 것도 할 수 있고요. 무엇이? 하고 이삭이 묻기도 전에 커튼과 문틈 사이로 에반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길게 뻗은 팔을 따라 자리하고 있는 다부진 손에는 장미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안녕, 이삭? 우리 드디어 만났네요.”
저의 손에 옮겨온 장미는 에반의 눈동자처럼 파래서 얼굴을 붉히기 좋았다.
“안녕, 에반.”
사랑에 빠지기 좋은 날이었다.
4. D-14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 루즈. 위대한 개츠비. 이삭은 커튼 아래로 건네지는 일련의 블루레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화 가져온다는 거. 농담 아니었어?”
“저 이런 걸로 농담 안 해요.”
자못 단호한 대답에 이삭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에반은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까탈을 부려대는 이삭에게 대체로 맞춰주는 타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져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바즈 루어만을 모른다고요?’
가령, 이삭이 저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을 모른다 하자 다음날 블루레이들을 들고 와 당장 영화를 감상해보라 권하는 이 상황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었다. 에반은 독특한 구석에서 은근 고집불통이었고 이삭은 이에 익숙하지 않았다. 알았다면 진작에 말렸겠지. 이삭은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다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 방에 블루레이 틀 수 있는 플레이어 같은 건 없는데.”
“뭐라고요?”
이삭의 집에는 기본적인 가전제품들을 제외하면 있는 물건보다 없는 물건이 더 많았다. 이 방에도 매트리스는 있지만 이불과 침대보는 없고, 책상엔 책들이 일부 꽂혀있지만 일기나 앨범 같이 사사로운 것들은 없는 그런 식이었다. 이삭이 새로 들여놓은 것 하나 없이 전 세입자가 버리고 간 물품들 투성인데 블루레이 플레이어? 그런 게 존재할 리 없었다.
“나한테 물어보고 가져왔어야지.”
잘잘못을 따지자면 이삭의 말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가져온 에반의 잘못이었지만 녀석은 커튼에 몸을 기댄 채 어찌나 크게 한숨을 내쉬던지. 이삭은 절로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하, 어쩔 수 없죠. 이걸로 보라고 할 수밖에.”
실망스러워하며 가방을 시끄럽게 뒤적이는 에반을 가만히 내두던 이삭은 뒤따라온 에반의 중얼거림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거? 이거라니. 또 뭘 가져온 거야. 이삭이 마른세수를 하거나 말거나 에반은 블루레이를 회수한 손으로 얇고 네모난 물건을 쓱 밀어 넣었다. 은색에 사과가 그려진 노트북이었다.
“며칠간 빌려줄게요. 블루레이로 봐야 몰입감 있고 좋겠지 하고 쟤들부터 챙기긴 했는데 없으면 이걸로 봐야죠.”
준비성 철저한 놈. 이삭은 제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하다 해야 하나 고민한 것이 억울해졌다.
“너. 내가 플레이어 없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그랬지.”
“제가요? 방에 들어간 적도 없는데 제가 그걸 어찌 알겠어요? 아, 바탕화면에 영화들 깔아줄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아무리 봐도 이삭을 당황하게 하고파 블루레이부터 들이민 것 같았지만 물증 없는 심증을 어찌하리 싶어 이삭은 얌전히 노트북을 기다렸다. 빰빠바밤- 에반은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하고자 영화를 한 편 틀어본 듯 했다.
“그런데 이삭, 그래도 귀여운 여인은 알고 있죠?”
“그래. 그것도 바즈 루어만 작품이잖아.”
“......아닌데요?”
젠장. 목록이 하나 추가되었다.
5. D-12
유독 짙게 드리워진 햇살에 방 안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 오후였다. 에반은 일하는 카페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는데 오자마자 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하루 종일 난리도 아니었다 하소연을 털어놓았고, 이삭은 ‘귀여운 여인’에서 에드워드가 고소공포증이 있으면서도 돈이 많다는 시답잖은 이유 하나 때문에 꼭대기 층에 위치한 호텔방에 머물렀다는 게 우스꽝스러웠다 늦은 감상을 늘어놓았다. 전자에 대해 이삭은 심심한 위로를 표했으며, 후자에 대해 에반은 그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이냐며 타박을 해댔다.
‘귀여운 여인’에 대해 심도 있게 파헤치던 둘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번갈아 주제를 바꾸어대었고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다 마침내 평행우주에까지 다다랐다. 살아감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무한함이라 생각해요. 에반이 말했다. 이삭은 에반도 평행우주를 믿냐며 신기해했다.
“어디서는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어디서는 아예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수도 있죠.”
“그게 목적이었구나?”
늘 관례처럼 해오던 농담도 빠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시시덕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었고 이삭은 이 시간을 일상이라 부를 수 있게 됨을 즐기고 있었다. 이삭은 에반이 걸어주는 모든 말이 좋았으며 그가 하는 말을 실수로라도 놓치지 않게 항상 바짝 긴장을 차리기까지 했다. 에반이 저에게 답한 문장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도 있었다.
“사랑해요.”
하지만 이삭은 어쩌다 에반이 그 말을 속삭이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사랑한다니, 사랑한다는 말은 물음이 아닌지라 무어라 대답을 해주어야하는지조차 어려웠다. 이삭은 에반을 좋아했고 에반도 저를 싫어하진 않는구나,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직접 말로 듣는 무게감은 완전 다른 것이었다. 말 못 한 사정도 있었다. 이삭은 귀신이었고 죽은 이었으며 에반은 살아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거절해야 할까? 사랑한다 말할까? 짤막한 침묵 속에서 이삭은 답을 찾아 헤매었지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더 빠르고 간결하게 이어졌다. 작별 인사는 없었다. 이삭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한다고 할 걸. 후회는 본디 여운이 긴 법이었다.
6. D-9
“나한테 잘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반한테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커튼을 달아주던 날이었다.
“커튼이요? 이거 다 저 좋으려고 가져온 건데.”
에반은 부담을 갖지 말라 했지만 이삭은 부담스러움을 느껴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신경을 써준다면 다음 날도 에반이 오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감에 부풀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
에반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영원히 안 오겠지.”
이삭에게 영원이란 겨우 9일이었지만 사람도 영원히 사는 건 아니었으니 귀신이라 해서 못 쓸 말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게다가 에반도 떠나버렸으니 어차피 혼잣말을 지껄여봐야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이삭은 고함을 질러보았다.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는다.
에반의 입장을 헤아려보면 잘 된 일이라고, 자신이 받아주지 않은 건 잘 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저가 너무 처량했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탓하다가도 그랬다. 이삭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가 너무 딱하게 여겨져 양껏 화를 표출할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귀신은 눈물을 흘릴 수 없었지. 한심해라. 에반이 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고대한다는 감정은 이삭에게 무척이나 생경한 것이라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삭은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았다. 에반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아주 오랫동안 말해주고팠다. 길기만 하던 21과 지금의 9라는 숫자의 차이는 영겁의 시간이다. 사라지고 싶을 땐 방치하더니 왜 이젠 살고 싶어졌는데 사라지라는 거야. 이삭은 야속하여 있는 힘껏 팔을 벅벅 문질렀지만 살갗은 붉어지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삭이지 못한 화는 애꿎은 노란 커튼을 향하려다 방문을 쾅 닫아버린다. 이삭은 그대로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7. D-7
“메리 크리스마스.”
“미안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사말이 교차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보자마자 차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받아주는 건가?”
에반은 이삭의 사과를 능청스럽게 받아쳐, 이삭은 얼버무리다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보느라 꼼지락거리며 커튼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삭과 달리 에반은 변한 게 없었다. 장난을 치는 것도,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고백에 대한 답을 달라하는 것도 낯설지가 않아 이삭은 에반이 없던 요 며칠간이 다 제 상상이었나 하고 볼을 꼬집어보았다.
통각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어쨌든 에반이 돌아왔다.
***
에반은 실은 거절당한 줄 알고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울증이 심해져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라 자초지종 설명했다. 아팠던 것이냐 심각하게 물어보자 에반은 이삭을 안심시키려는 듯,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란 말을 덧붙여왔다. 조울증은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증상인데 평상시엔 약을 잘 챙겨먹고 있다는 말도 거듭 강조했다. 가끔 제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하필 그 날 부로 우울증이 심해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어요. 에반은 끝으로 저야말로 미안하다며 진심어린 사과를 건넸다.
“인사도 없이 가버려서 놀랐죠.”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뜬금없이 사과부터 하는 게 완전 이상했는데.”
말도 안 걸어줄 정도로 화난 거예요? 에반은 이삭이 눈에 띄게 조용하자 토라졌다고 오해했는지 우물쭈물 재차 미안하다 하였다.
“용서해줘요.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이삭은 심장 부근이 찔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가책이 느껴져서이기도 했고 화가 나서이기도 했다.
“조울증 그게 뭐 어때서? 아픈 거잖아. 아픈 거면 보살핌을 받아야지 왜 네가 사과를 해. 나야말로, 나야말로 사과해야하는데.”
이삭은 씨근덕거리다 눈을 질끈 감았다. 사과할 일이 뭐가 있어요. 에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이삭은 말해줄 수 없었다. 에반, 사실 나는 귀신이야. 내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다른 사람들은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없어. 신기하지? 자조적으로 되뇌었던, 만약에, 만약에 에반이 돌아온다면 말해주어야지 하고 밀어두었던 진실을 털어놓기에는 저의 감정은 너무도 얄팍한 것이다.
“그냥......나는 네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쓴 끝에 꺼낼 수 있는 말 역시 진실이 아닌 진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뭐예요. 에반의 허탈한 웃음이 제법 느리게 뒤따라왔다 사라졌다. 일말의 정적에 숨소리만 고루 방안을 채웠다.
“그럼 나랑 게임 하나 할래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삭은 에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커튼을 바라보았다. 에반은 커튼을 그러쥐고 있었다. 이거 아무하고나 하는 거 아닌데 이삭이니까 알려줄게요. 이름하여 이삭과 에반의 시시각각. 대뜸 이름부터 급조한 티가 나는 게임을 하자고 말을 쏟아붓는 에반에 이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게임하자는 말이 나와? 이 상황에서?”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미래를 향한 말이잖아요.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니 지금을 누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명색이 크리스마스인데.”
“넌.......”
“사랑한다니까요.”
이삭은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에반은 멀끔하게 웃어댔다. 이삭도 나를 좋아하잖아요. 이삭은 긍정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정답도, 오답도 아닌 그것은 반칙이었다.
“게임 규칙은 간단해요. 이제부턴 앞으로 벌어질 1분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거예요.”
같이 할래요? 막무가내인 에반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안 될 것도 없었다.
“그럼 이번 1분 동안은 뭘 할 건데?”
“음, 지금은……”
에반은 고민하던 척 느릿느릿 말을 잇다 키스할까요? 하고 물어왔다.
“뭐?”
이삭은 이 마당에 또 농담이냐며 살짝 웃어 보였다. 방금 웃었죠. 에반이 말했다.
“내가 말 할 때마다 커튼 날리는 거 보여요?”
에반의 목소리에 맞춰 유난히 노란 커튼이 이삭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저 지금 커튼에 얼굴 맞댄 채 눈 감고 있어요. 이삭은 기가 막혀 하면서도 커튼의 결을 따라 에반의 얼굴을 매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건 얼마만의 온기인가. 좋아한다는 말이 에반에게 절로 스며들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에반이 이삭의 손에 기대었다.
“나는 이삭이랑 사랑에 빠지겠구나, 하고요.”
이삭은 그거 멋지네, 하고 커튼을 통해 에반의 뺨을 몇 번이고 감싸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봐요. 이삭도 날 좋아한다니까. 아주 짧은 맞닿음이었지만 이삭은 입가에 따스함이 묻어나 울고 싶어졌다.
완벽한 크리스마스였다.
8. D-5
“……삭! 이삭!”
큰 소리로 반복되어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몽롱한 정신을 뚫고 뇌리에 박힌다. 부스스 눈을 찌푸리던 이삭은 어느 샌가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는 햇빛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삭? 한 번 더 저의 이름이 방안을 메웠다. 에반이 이삭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어, 에반. 잠 좀 자느라.”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기억을 되뇌어보지만 이삭이 떠올릴 수 있는 건 침대에 누워 한참을 바라보았던 어두컴컴한 천장뿐이었다.
“외출이라도 한 줄 알았잖아요. 10시인데 아직도 자고 있었어요?”
“그러게.”
이삭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신은 잠을 잘 필요가 없다. 한동안은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본 손목엔 숫자 5가 새겨져 있었지만 이삭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초조한 마음이 일었다. 만일 이 숫자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래서 잠에 취하게 되는 것이라면? 잠에 들어 다신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해야 될까. 무지는 짐작을 낳고, 짐작은 걱정을 가져오는 법이었다.
“이삭이 자고 있었다면 아까까지만 해도 새벽이었던 거죠. 안 그래요? 좋은 아침.”
하지만 견고하게 다져져만 가던 걱정스러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의 다정함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에반은 그런 존재였다. 이삭은 보이지 않을 미소를 희미하게 그려 보였다.
“좋은 아침.”
시간은 남아있어야만 했다. 적어도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을 최소한의 시간 말이다.
9. D-2
밖에는 눈이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단골손님조차 오지 않을 정도로 추운 날씨. 에반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에반은 이 곳에 찾아오는 시간을 점심 이후로 통일시켰다. 아침잠이 늘은 이삭을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이삭은 에반이 찾아온 때마저도 종종 졸아댔다. 졸음은 불가항력적으로 쏟아져 그간 잠 못 이룬 밤들이 버티다 버티다 벼랑 끝에 다다라 내린 건가 자문도 해보았지만 이삭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문득 쏟아지는 졸음을 쫓고자 에반에게 귀신을 믿느냐 물음을 던져보았다. 에반은 예전엔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믿는다 답했다. 왜 바뀌었는지 물어보자 에반은 저에게 엄청난 가설을 펼쳤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말해주었다.
가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죽은 뒤에는 곧장 사후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과 잠시 귀신으로 살아가는 방법, 크게 두 가지 선택사항이 존재하는데 사후 세계로 가게 된다면 다음 생을 받아들이게 되겠지만 귀신이 된다면 굉장히 혹독한 고통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삭은 그럼 누가 귀신이 되길 바라겠냐며 이상하다고 반박하였다. 그러자 에반은 고통을 감당할 만큼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라 말을 이었다. 귀신이 된다는 건 사후세계로 가기 직전에 유예기간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보고 싶은 이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이삭은 고작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귀신이 되기를 택하는 건 바보 같다며 이를 믿는 에반도 바보 같다 했다. 에반은 가벼이 웃음으로 답했고 이삭은 웃지 말라며 설사 그 가설이 맞다 하더라도 절대 귀신이 되지 말라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이삭은 진심으로 그 가설이 맞는 이야기라면 저가 그렇게 선택하고자 한 이유는 바로 에반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
에반은 이삭에게 내일 함께 새해를 기다리지 않겠느냐 물었다.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이라 했다. 이삭은 당연히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10. D-1
“해피 뉴 이어.”
“아직 새해가 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뻐꾸기가 요란하게 열한 번 울려대다 시계 안으로 들어갔으니 에반의 말이 맞았다. 이삭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하품을 연거푸 해댔다.
“그냥. 미리 인사하면 소원도 미리 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에반은 실없는 소리도 할 줄 알았냐며 놀려왔다. 웃지 마. 졸려 죽겠으니까. 태평한 에반에게 이삭은 볼멘소리로 읊조렸다. 저녁부터 12시가 되는 것을 기다리고자 아침과 점심을 자는 데에 몰두하였는데도 졸음은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삭의 고개가 또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올라선다.
“만약에 내가 자는 거 같거든 새해가 되기 1분 전엔 꼭 깨워줘야 해.”
“졸리면 계속 자도 괜찮아요.”
“1분 전엔 깨워야해. 약속이야.”
굳이 1분 전에 힘들게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데. 에반의 목소리가 잠결에 옅게 흩어진다. 왜냐하면 나의 소원은 너와 새해를 같이 보내는 거거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내내 맴돌고 있던 그 말을 온전히 소리 내어 에반에게 대답했던가? 모르겠다. 소원을 빌기 위해선 새해에 다다라야 하지만 그 소원을 빌 수 있는 새해는 오지 않을 테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삭은 쏟아지는 잠에 찬찬히 눈을 감았다.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상냥함만이 잔잔하게 머무는 고요한 밤이었다.
Epilog. D-21
살다 보면 불시에 찾아온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쳐 인연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기묘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카페로 출근한 첫 날 처음으로 주문 받은 이의 뾰로통한 모습에 사랑에 빠진다든지, 그런데 타이밍 좋게 그 사람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든지, 그래서 그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어 졸업을 한 후 같이 살게 된다든지. 이게 다 내게 일어난 일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에반이 그렇게 말하면 이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툭 하고 부딪혀왔다. 우리는 인연이 아닐까 하는 게 아니라 인연이야. 내가 단언할게. 이삭의 말은 언제나 옳았기에 에반은 그의 볼을 쓰다듬다 입을 포개는 것으로 알아들었음을 표현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 이삭은 끊임없이 퍼부어지는 키스에 웃음을 터뜨리다 에반을 꽉 끌어안아 저지하며 물었다. 에반은 이삭의 어깨에 머리칼을 살포시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게. 어떻게 살아갈까?
***
“네 집에 귀신 산다더라.”
지끈거리는 머리에 대한 처방전으로 커피를 내려 홀짝이던 에반은 에스킬의 엉뚱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뜩이나 뒤숭숭한 꿈을 꿔 울적한데 귀신이라니 무슨 소리람. 에스킬과 린이 함께 사는 이 집에 머문 지도 어언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이 근방에서 문제가 되는 건 술주정부리는 윗집 ‘사람’ 한 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아니, 여기 말고.”
에반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 법도 한데 그 말을 끝으로 에스킬은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어 먹느라 바빴다. 수상쩍다 여기며 머리를 굴려보던 에반은 그제서야 저가 5일이나 집세를 밀렸음을 깨달았다. 집세 때문에 으스스한 말을 꺼낸 건가. 뭔가 에스킬다운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출근하면서 집세 이체하도록 할게.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에스킬은 대답을 해주느라 억지로 많은 양의 시리얼을 삼켰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다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쓸데없는 추리는 그만하고 기다리라는 제스처였다. 눈물까지 흘리기 직전인 에스킬에 에반은 잠자코 마저 남은 커피나 들이켜댔다.
“언제 가봤어? 문 안 잠근 거 같던데.”
아아, 흠흠. 목을 고르던 에스킬은 머뭇거리다 재빨리 물음을 던지고는 다시 시리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전에 린이랑 같이 물건 가지러 갔을 때 우리는 잠그고 왔거든.”
남들이 들었으면 무슨 동문서답이냐 따졌을 말이었겠지만 에반은 에스킬이 어디를 지칭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삭과 에반의 집. 에스킬은 그 곳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이라 칭하지 않고 네 집이라 했구나. 머리가 울렸다.
‘에반……. 놀라지 말고 들어.’
파리하게 떨고 있어 서둘러 말해보라 재촉할 수도 없었던 요나스와의 새해 첫 통화는 이렇게 에반의 머리가 울리는 때를 틈타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구급차가 오는 대로 응급실에 갔지만 손 쓸 방도가 없었대.’
시간은 유려하게, 잔인하게 빠른 속도로 흘러가지만 에반은 그 물살에 벗어나 정지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이삭이 죽었어.’
이삭은 죽었으니까.
그나저나 집세 밀린 건 용케 기억하고 있었네. 감동이다, 야. 에스킬은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무마시키고자 다른 주제를 덧붙여 꺼내왔지만 에반의 얼굴은 이미 굳은지 오래였다. 안 그래도 조용한 축에 속하던 주방은 방문을 뚫고 시끄럽게 울려대는 린의 알람 소리에 어수선해졌다 이내 정적이 찾아온다. 알람이 꺼진 동시에 이 집의 소리는 모두 사라진 것 같아 마치 물 속 깊이 잠식당한 기분이었다. 린은 늦잠을 자는지 방문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반의 빈 찻잔이 탁, 하고 식탁에 놓인다.
“에반.”
에스킬도 억지로 밝은 척 하기를 포기했는지 얼굴을 쓸어내리며 느릿느릿 에반을 불렀다.
“현관문을 열어두지도 않지만 잠가두지도 않은 것처럼 애매하게 걸치고 있으면 더 힘들어져. 그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일부러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다는 말이야. 나랑 린은 네가 여기로 이사 와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하지만……”
“카페 늦겠다. 출근할게.”
에반은 에스킬의 말을 가로막으며 애써 표정을 풀어 보였다. 마침 시계는 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9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하는 에반에겐 정말로 늦장부릴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으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들어가봤어?”
주방에서 막 벗어나려던 에반에게 에스킬은 마지막으로 짧은 물음을 던졌다. 에반은 에스킬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니.”
***
“청승 떨 거면 오늘은 그만 들어가 보지 그래?”
경쾌한 얼음소리와 함께 볼에 차디찬 아메리카노가 부딪혀왔다. 에반에게 커피를 내민 건 다름 아닌 소냐였다. 에반이 거절의 뜻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이자 소냐는 챙겨줘도 안 받아먹냐며 툴툴댔다.
“출근 전에 이미 진하게 한 잔 마시고 왔어.”
“그렇다고 민망하게 단칼에 거절하기야? 일 그만둔다는 말도 없이 잠수 탔다 돌아온 한량 인생 구제해준 게 누군데.”
“어째 갈수록 독설이 느는 거 같다?”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손님들이 전부 나한테 주문하러 오잖아. 명색이 카페 얼굴마담인데 울적하게 있지 말라고.”
소냐는 까치발을 들어 에반의 머리칼을 헤집어놓은 뒤 버림받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상대가 우울해하면 따뜻한 위로의 말 대신 평소와 같이 행동해줄 것. 그게 엘베바켄을 다닐 때부터 이어져온 에반과 소냐의 우정 방식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벌써 5년차에 접어든 이 오래된 습관 덕분에 에반은 소냐가 편했고 고마웠다.
“그래도 내가 니센으로 전학 간다 했을 땐 펑펑 울지 않았었나?”
뜬금없는 에반의 말에 소냐는 질색하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살면서 그 때 운 것만큼 후회하는 일이 없으니까 언급도 하지 마. 미카엘은 아직도 그거 가지고 놀린다고.”
너랑 이 카페에서 같이 알바하게 된다는 것만 미리 알고 있었어도. 씩씩거리는 소냐의 분노에 에반은 짓궂게 웃어댔다. 소냐와 에반은 에반이 전학 가기 직전까지도 동급생들에게 둘이 사귀냐는 의혹을 받고 다닌데다가 소냐는 좀처럼 울지 않는 강한 사람이었으니 미카엘과 다른 애들 성격상 어지간히 놀려댄 게 분명했다. 억울할 만도 했다. 소냐는 그저 에반의 조울증을 알고선 남몰래 챙겨준 건데 다른 친구란 것들은 죄다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자빠졌었으니 말이다.
“걔들도 이제 알잖아. 나 조울증인 거.”
“아는 놈들이 더 놀려요. 애초에 우리가 어딜 봐서 사귀는 사이야?”
동감이었다. 하지만 소냐와 에반의 생각과 달리 둘은 고등학교를 벗어나 카페에서도 그런 오해를 자주 샀다. 하도 친하게 지내던 게 탈이었을까.
‘저기……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해서요.’
심지어는 이삭이 그렇게 물어온 적도 있었다. 에반이 이삭에게 반하고, 이삭이 카페를 찾은 지 5일 째 되는 날이었다.
‘절대 아닌데요!’
이삭이 시킨 커피에 하트를 그려 넣고 있던 에반은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고, 친구는 닮는다고.
‘얘는 손님을 좋아하는데요, 손님!’
소냐는 아예 한 술 더 떠서 대리 고백도 해주었더랬다. 하필 그 날은 단골손님들이 자리란 자리는 죄다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카페 내에 사람들이 많아 이만저만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도 나름대로 추억의 연장선이었다.
“뭘 그렇게 봐?”
소냐는 말이 없어진 에반에게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별 거 아냐. 에반은 다시 그 때의 기억으로 돌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리 고백에 공개 고백까지. 수습 불가였던 그 날 이삭이 에반을 받아주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에반이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찰나, 이삭은 고개를 숙인 채 아 그렇구나. 담담하게 그리 말하고는 어그러진 하트 모양의 커피를 가지고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갔으니까. 둘이 이어지게 된 것은 순전히 소냐가 넉살 좋게 에반의 어깨를 두드려줘서였다.
‘왜 벽에 머리는 내리치고 있어? 이삭도 귀 빨개져서 나갔잖아. 귀엽네. 나중에 밥이나 사라.’
에반은 다음날, 카페를 찾은 이삭에게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했고 승낙을 받았으며 이튿날 소냐에게 극진히 식사를 대접했다.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그 땐 정말 고마웠지.
“그나저나 귀신 나왔다며, 너네 집.”
그리고 그 고마운 대상은 에반의 감동을 보기 좋게 깨뜨려왔다.
“과거의 너한테 고맙다 여기고 있는데 그렇게 분위기 초치기야?”
“과거의 나? 네가 나한테 고마워할 게 한 두 개야?”
리스트 써줘? 소냐는 여간 제정신이 아니네, 하는 눈빛이었다.
“에스킬한테 들은 거지?”
“그래. 문자로 절절하게 말해주더라.”
에반은 인상을 찌푸리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돈독한 우애 어디 안 간다고, 물론 들었겠지. 에스킬과 소냐는 사촌 지간으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가 좋았다. 이삭이 소냐와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 계기도 이삭이 한 때 신세를 졌던 에스킬과 소냐가 사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근데 에스킬이 아니었어도 요 근방 사람들은 다 알아. 어린 애들이 빈집 탐방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쳐대며 나온 지 좀 되었거든. 문이 안 잠겨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 걔네 말고도 담력 체험한답시고 들어가려는 애들 꽤 많다더라.”
걔들은 내 선에서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소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들어는가봤고?”
에반은 쓴 웃음을 지었다. 에스킬이나 소냐나. 왜 만나는 사람들마다 들어가고 말고를 중요히 여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 들어갔네. 그 와중에도 소냐는 혀를 차며 에반을 간파해왔다.
“듣자마자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 근데 그럴 거면 카메라는 왜 챙겨왔어?”
설마 집 팔려고? 소냐는 무심하게 카메라를 가리켰다.
“에스킬 말대로 머무르지도 못할 집에 10개월 치 집세를 내고 있는 건 미친 짓인 거 같아서 한번 들려보려 한다. 왜.”
또 뭐라 잔소리를 하려고? 에반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이삭에 대한 얘기에 자리를 뜨긴 했지만 에반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에스킬의 말이 왕왕 울려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어보았다 잠그지도 못하고 떠난 건 트롬쇠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이삭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어 짐 정리도 에스킬과 린에게 맡겼으면서 그래도 시간이 한참 흘렀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용기를 내었던 것인데 실패했던 흔적이었다. 과거에 얽매인 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 소냐는 에반의 말에 심난한 표정으로 그래, 알아. 아는데. 하고 입술을 바르작거렸다.
“그래. 난 또. 네가 귀신 소리 듣고 설치는 건가 했지.”
“난 귀신 안 믿는데.”
“누가 믿는데?”
그럼 뭐가? 에반이 빤히 바라보자 소냐는 말하기 힘든지 얼굴을 찡그려댔다.
“이삭이 그랬잖아. 자기는 죽으면 귀신이 될 거라고.”
***
‘아냐, 일단 내 얘기를 들어봐.’
귀신이 될 거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바야흐로 3년 전, 소냐의 생일로 흘러간다.
‘죽는다고 해서 꼭 귀신이 되는 건 아니야. 사후 세계로 곧장 넘어가서 다음 생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남아서 떠도는 거지.’
어떻게 귀신 얘기로 빠지게 된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이삭이 맥주를 들이키며 열성적으로 늘어놓은 주장들이었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귀신이 되겠지? 근데 귀신이 되면 부작용이 있을 거야.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귀신은 사람들하고 소통을 할 수 없는 걸 거야.’
이삭은 귀신이 되면 이름을 제외한 모든 기억들을 잃어버려 자신이 왜 귀신이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운이 좋아 그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하고만큼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기필코 만나야지. 그러려고 귀신이 된 건데.’
에반은 어처구니가 없어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 이삭이 좋아 맞장구를 쳐주었던 것 같다.
‘나라면 어떡할 거 같냐고? 내가 먼저 죽는다면 난 귀신이 되어서 우리 집에 머물 거야. 그럼 넌 나를 보러 올 테고, 난 다시 너와 사랑에 빠질 거라고.’
이삭이 처음으로 저에게 사랑한다 말한 거나 다름없는 날이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술에 취해 집에 어찌 들어갔는지도 가물거리는 그 날, 귀신이 되면 커튼을 달아 말을 주고받을 거라는 농을 주고받으며 방위에 커튼 봉을 설치하다 넘어져 무릎이 까졌던 일까지도 이렇게 생경한데.
***
에반은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고 급히 문을 나선 터라 갈색 넥타이는 뛰는 속도에 맞춰 이리저리 휘날리는데 그 와중에도 에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스산한 나뭇가지와 자전거 경적소리가 이따금 거칠게 내모는 에반의 숨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바지 주머니가 가벼운 걸로 봐선 지갑은 라커에 두고 온 듯 했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카페 알바 시간은 내일도 소냐와 겹치게 스케줄이 나와 있었으므로 출근하면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냐는 잔소리가 한바탕 이어질 게 뻔했지만 에반은 상관없었다. 에반의 신경은 온통 목적지를 향해있었고 목적지는 명확했다. 이삭이 있는 곳이었다.
너 그 날 너희 방위에 커튼봉도 달았다고 나한테 자랑도 했는데. 계단을 오르면서도 소냐의 말이 지워지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왜 그 대화는 잊고 있었던 걸까. 자책이 밀려온다. 이삭은 언제나 옳았다. 하물며 허무맹랑한 가설들을 늘어놓을 때에도, 이삭과 에반에 관한 것이라면 그 말은 진실이 되었고 미래가 되었다.
그러니 이 곳에 있다면
“혹시 누구 있나요?”
제발 대답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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